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꺼삐딴 리 (문단 편집) == 줄거리 == 이인국 박사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서울의 유명 2차 병원의 병원장이다. 전공은 [[외과]]지만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도 들여서 대형 병원을 만들어 놓았다.[* 의사는 의과 대학 졸업 후 의사 면허만 취득하면 전문의가 아니더라도 모든 과의 의료 행위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인국도 외과 전문의지만 다른 진료도 다 가능하다.] 첫 아내와 사별했지만 20살 연하인 [[간호사]]이었던 혜숙을 후처로 삼아 늦둥이 아들을 낳고 살고 있다. 큰아들은 [[소련]]의 [[의과대학]]으로 유학을 갔으나 [[6.25 전쟁]] 이후 소식이 끊겼고 딸은 [[미국]]으로 유학 가서 미국인 교수와 결혼하기로 했다. 한편 이인국 박사는 자신의 의사 경력을 빛내기 위해 미국행을 준비하던 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급 대우인 [[미국 국무부|미국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미국에 가기 위해 예전에 주한 미국 대사 브라운 씨에게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확정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인국 박사는 차를 타고 브라운 씨의 [[관사]]로 간다. 출발하기 전 석간신문을 읽으면서, 그리고 운전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 [[일제 강점기]]의 이인국 박사는 [[평양]]의 유명 외과 병원 원장으로 [[결벽증]]적인 깔끔함과 꿈에서조차도 [[일본어]]를 고집하는 깐깐한 성격이다. 진찰실에 나오자마자 손가락 끝으로 창틀이나 탁자를 훑는데 이때 손가락 끝에 먼지라도 묻으면 불호령이 터진다고 한다. 그런 날에는 간호원은 종일 원장의 신경질에 부대껴야 한다. 주 고객은 [[일본인]]이나 친일 조선인 부호 등으로, 가난한 이들이나 [[불령선인]]은 가차 없이 내치는 인물이었다. 해방 후인 현재는 [[높으신 분들]]이나 [[재벌]]이 주요 고객이다. [[8.15 광복]] 이후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고 [[소련군정|로스케]][* [[로스케]]는 러시아인을 지칭하는 일본어 비속어로, 현재는 [[인종차별]] 용어로 간주되어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다.]의 [[신탁통치]]가 시작되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색출 및 처벌이 시작된다. 소식을 접하자 이인국은 '잠꼬대도 일본어로 할 정도'로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면서 수여받은 "국어 상용의 가"(國語常用の家)[* 당시의 국어, 즉 [[일본어]]를 항시 사용하는 집안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일제가 친일파 집안에 상으로 수여하던 팻말이었으며 보통 집 문패 쪽에 붙여 놓거나 집 안에 액자로 전시해 두었다.] 액자 내용물을 갈기갈기 찢어 흔적도 없애 버리고 치안의 안정을 위해 무기를 반납하라는 방송을 듣고 사냥을 위해 구입한 신품 [[영국제]] [[산탄총]]을 떠올린다.[* 이 부분은 EBS 국어 교재에 실린 적이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신이 치료를 거부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춘석[* 춘석은 해방 6개월 전쯤 일제의 제국주의를 전복시키려고 한 사상범으로서 감옥에 있다가 질병에 걸려 [[가석방]]되었을 때 이인국 박사의 병원에 실려 간 인물이다.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였으나 이인국 박사는 경제적 능력도 안 되고 [[사상범]]이었던 춘식을 응급 치료만 하고 입원은 거절했다.]에게 딱 걸려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찍혀 형무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애지중지하던 [[회중시계]][* 월쌈(Waltham) 17석. 미국의 시계 회사 월쌈이 만든 보석 베어링이 17개가 박혀 있는 시계를 뜻한다.]를 소련군 병사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 시계는 이인국이 [[제국대학]]을 졸업할 때 받은 수상품이며 뒤쪽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자기 전에도 비상용 금고에 넣고 자는 등 이인국에는 인생의 반려와도 같은 물건이다. 설상가상으로 형무소에서는 온갖 욕설과 구타에 시달렸다. 아래 대화 참고. > 노란 털이 엉성한 손목이 시곗줄을 끄르고 있다. 그는 반사적으로 앞자락의 시계 주머니를 부둥켜 쥐면서 손의 임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파란 중대가리 소련 병사가 시곗줄을 거머쥔 채 이빨을 드러내고 히죽이 웃고 있다. > ''…(생략)'' > "흥…… 야뽄스키[* '일본'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형용사 "Японский"(야폰스키/이뽄스끼). 허나 여기서는 명사형인 "Японец"(야포네츠/이뽀니쯔)가 문법적으로 더 적절하다.]……." > 병사의 눈동자는 점점 노기를 띠어 갔다. > "아니, 이것만은!" > ''…(생략)'' > '죽음과 시계…….' > 이인국 박사는 토막 난 푸념을 되풀이하고 있다.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때마침 형무소에 [[이질]] 환자가 발생하였는데[*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이인국이었다. 죄수 하나가 심상찮아서 보니 바지에 변을 지리는 상황이었으며 변에 피가 섞여 있었다.] 이들을 치료할 만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없자 형무소장은 이인국을 불러 응급 처치실에서 일할 것을 명령하면서 죽음을 앞둔 처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의사라는 직업 덕분에 죽음의 위기를 면했기 때문에 이인국은 의사가 자신의 천직(天職, 타고난 직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응급 처치실에서 이인국은 스텐코프[* '스텐코프'를 [[전사#s-4.2|전사]]하면 'Стенков' 정도가 되는데 [[구글]] 및 [[얀덱스]] 검색 결과 러시아 현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성씨가 아니다. 실존 인물이라는 가정하에 더 찾아보면 [[발칸반도]](남슬라브계) 지역 성씨 중에 '스탄코프'(불가리아어 Станков, 세르보크로아티아어 Stankov)가 있고 체코 성씨 중에 슈텐코프(Štěnkov)가 있긴 하다. 아니면 [[테렌티 시티코프]]의 이름을 약간 비튼 것일 수도 있다.]라는 이름의 소련군 장교가 [[높으신 분]]이란 사실을 깨닫고 잘 보이기 위해 성심성의껏 환자들을 돌보고 [[러시아어]] 교본을 구해 불철주야 러시아어 공부에 매진한다. 감옥에서 죄수들은 러시아어 교본 및 '당사(黨史)'(공산당 역사책)만 읽을 수 있었는데 이인국은 감방에 있던 선생이 나가면서 두고 간 러시아어 교본을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생명의 열쇠'라도 되는 듯 읽었다고 한다. 스텐코프 역시 그런 이인국에 호감을 보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친분 관계가 형성되고 말도 통하자 그의 턱에 있는 혹을 수술해 주겠다고 제안하였으며[* 표현에 따르면 턱에 있는 혹이 오리알만 하다고 한다. 실제로 상당한 콤플렉스였는지 이인국이 혹을 수술하려 하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좋다(хорошо, 하라쇼)를 연발했을 정도.]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쳐 스텐코프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참고로 서약서에는 '''"수술 실패 시 [[총살]]"'''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목인 '꺼삐딴 리'는 수술이 성공한 후 스텐코프가 이인국을 칭찬하면서 그를 부른 호칭이다. 덕분에 이인국 박사는 아직까지도 불안하던 신변의 안전을 완전히 보장받을 수 있었으며 상술한 소년병에게 빼앗긴 회중시계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친소]] 노선을 걷기로 결심하였으며 아들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라고 격려하였고 아들을 소련에 유학 보내라는 스텐코프의 추천으로[* 스텐코프 본인의 추천은 아니었다. 애초에 스텐코프는 계급이 소좌에 불과해 본인의 권한이 그렇게 막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사람은 줄을 잘 섰는지 그의 라인에 있는 고위 장교의 추천을 받아 소련 유학을 결정지었다고 언급된다. 장성급 고관의 뒷배가 있는 모양.] 소련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아들을 [[모스크바]]에 유학까지 보냈지만 전쟁 통에 이인국 박사의 가족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소식이 두절되었다. 회상이나 언급을 통해 보면 [[6.25 전쟁]]이 발발해 [[청진기]]와 회중시계 하나만 들고 남한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아내는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병사했다. 후처인 혜숙은 1945년에 이미 이인국의 병원에서 일하던 인물로 20년 연하인데 어쩌다 보니 결혼하게 되었다. 남한에서도 뛰어난 의술 덕분에 [[미군]]의 환심을 사게 되고 그 지원으로 대형 병원의 원장을 지내게 되자 이번엔 [[친미]] 노선으로 갈아탔다. 유학 간 아들의 생사는 불명이었고 대신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딸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딸의 이름은 나미. 본래는 나미코(奈美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해방 전까지 이인국은 자기 딸을 일본식 애칭인 '나미[[ちゃん|짱]]'이라고 불렀다.] 해방되자마자 이인국 박사는 [[우디르#s-12.1|친일 행적을 지우기 위해 그녀의 이름을 나미로 바꾼 바 있다.]] 친미파라서 자식을 유학 보낸 것도 있고 어제까지 언니였던 또래 나이의 간호사가 새엄마가 된다는 것이 문제가 있어서 불편한 가족 분위기 때문에 본인이 도피성으로 간 것도 있다. 원래는 나미도 혜숙을 언니처럼 따랐고 아버지와 혜숙의 재혼에 찬성했는데 아버지의 외로움을 동정했기 때문도 있지만 나미 자신도 아버지의 시중이 힘에 겨웠고 혜숙이 사실상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와 혜숙이 재혼하고 나니 혜숙을 어려워했다고. 이후 딸은 미국인 동양학 교수와 눈이 맞아 결혼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미국인 교수는 나미가 [[영어영문학과]]를 택했을 때 개인 지도를 해 줬을 뿐만 아니라 [[장학금]]을 얻게 해 주기도 했고 유학 절차의 재정 보증인을 알선해 주기까지 했다. 이인국 본인도 이게 웬 떡이냐고 내친 김에 나미가 미국 유학을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고 더군다나 "이왕이면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싶다"고 밑밥을 슬쩍 던지는 미국인 교수의 말에 그 한국 여성이 자기 딸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자기의 학문을 위해 탁월한 견해'라며 찬성까지 해 준지라 이제 와서 이 결혼을 반대할 체면도 구실도 없어진 셈이다. 20세기 초중엽을 살아 온 보수적인 인물인 이인국은 [[국제결혼]]을 탐탁잖게 여겨 죽 쒀서 개 줬다고까지 생각한다. 미국과는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지만 딸이 아예 [[인종]]이 다른 [[코쟁이]] 미국인과의 [[흰둥이]] [[혼혈]] 손자를 낳는다는 걸 꺼림칙하게 여기기도 한다. [[내선일체]]에 입각하여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인처럼 살아간다는 것에는 별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지만 인종이 아예 다른 사위를 맞는다는 것을 썩 내켜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늦둥이 아들이 대학 갈 때 유학 알선에 도움이 될 테니 코쟁이 사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마침내 딸의 결혼을 납득한다. 위와 같은 회상과 생각들을 하는 사이 이인국 박사는 브라운 씨의 관사에 도착했는데 중요 문화재인 [[고려 청자]]를 브라운 씨에게 선물하고 브라운 씨는 만족해한다. 영어도 개인 교습을 통해 갈고닦아 왔던지라 브라운으로부터 문법과 발음 면에서 칭찬을 받는 등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미국 [[국무부|국무성]]에서 통지가 왔다며 이인국 박사의 미국행이 성사되었음을 알려준다. 이인국 박사는 감사를 표현하며 며칠 뒤 휴전선 근방으로 사냥을 가자는 약속을 잡는다. 이인국 박사는 자신의 앞으로의 길을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소리친다. >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이윽고 택시를 타고 반도호텔[* 미국행 항공권을 구입하기 위해 가는 것인데 반도호텔에는 [[대한국민항공]]의 영업점이 있었다. 참고로 반도호텔은 1938년 일본인 노구치가 세운 호텔로 조선철도호텔(現 [[웨스틴 조선 서울]])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 최고의 호텔로 여겨졌다. 1979년 철거되어 현재는 롯데호텔 서울이 그 자리에 있다.]로 가는 이인국 박사의 모습과 함께 소설은 끝난다. >차창을 거쳐 보이는 맑은 가을 하늘이 이인국 박사에게는 [[해피 엔딩|더욱 푸르고 드높게만 느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